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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는 "공짜"가 아니다 — 보증금의 숨은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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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는 "공짜"가 아니다 — 보증금의 숨은 비용

"전세는 보증금만 맡겨두면 공짜로 사는 거잖아요." 한국에서 전세 제도를 설명할 때 흔히 듣는 말입니다. 실제로 매달 월세처럼 눈에 보이는 지출이 없으니, 전세가 가장 경제적인 주거 형태라고 느끼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에는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포기한 다른 선택의 가치를 말합니다. 전세 보증금 4억 원을 집주인에게 맡겨둔다는 것은, 그 4억 원으로 할 수 있었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비용을 계산해 보면, 전세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세 보증금의 기회비용 계산

서울의 평균 아파트 전세가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2024년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는 약 5억 원 내외입니다. 강남권은 7~10억 원,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은 5~7억 원, 노도강(노원·도봉·강북)도 3~4억 원 수준입니다.

전세 보증금 4억 원을 맡겨두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돈의 기회비용을 여러 기준으로 계산해 보겠습니다.

가장 보수적인 기준인 정기예금 금리(연 3.5%)로 계산하면, 연간 기회비용은 1,400만 원, 월로 나누면 약 117만 원입니다. 즉 전세에 사는 것은 매달 117만 원의 월세를 내는 것과 경제적으로 동일합니다.

주식/채권 혼합 포트폴리오(연 5%)로 계산하면, 연간 기회비용은 2,000만 원, 월 약 167만 원입니다. S&P500 장기 수익률(연 8%)로 계산하면, 연간 기회비용은 3,200만 원, 월 약 267만 원입니다.

4억 원의 전세 보증금을 묶어두는 것은 매달 117만 원에서 267만 원의 월세를 내는 것과 같은 셈입니다. "공짜"와는 거리가 먼 수준입니다.

5년간의 기회비용 누적

단순히 매달의 기회비용만 보면 체감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5년이라는 기간으로 확장해서 보겠습니다.

보증금 4억 원을 5년간 전세로 묶어두면, 정기예금 기준(연 3.5%, 복리)으로 5년 후 이 돈은 4억 7,500만 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기회비용 총액은 7,500만 원입니다. 주식/채권 혼합(연 5%, 복리)이라면 5억 1,000만 원, 기회비용 1억 1,000만 원입니다. 적극적 투자(연 8%, 복리)라면 5억 8,800만 원, 기회비용 1억 8,800만 원입니다.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5년에 7,500만 원, 연간 1,500만 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지출하고 있는 셈입니다.

10년간의 격차: 전세 vs 매수

이번에는 같은 4억 원을 가진 두 사람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박전세 씨는 서울 마포구에서 전세 보증금 4억 원으로 아파트에 거주합니다. 매달 추가 지출 없이 편하게 삽니다.

최매수 씨는 같은 4억 원 중 1억 5천만 원을 자기자본으로, 나머지 2억 5천만 원은 투자에 활용합니다. 6억 원짜리 아파트를 자기자본 1억 5천만 원 + 대출 4억 5천만 원으로 매수합니다. 월 대출 상환금은 약 200만 원입니다.

잠깐, 이 비교가 불공정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최매수 씨는 매달 200만 원을 지출하고 박전세 씨는 0원이니까요. 그래서 박전세 씨도 나머지 유동 자금과 매달 절약되는 금액을 투자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박전세 씨는 매달 아끼는 200만 원(최매수 씨가 대출 상환에 쓰는 금액)을 매달 연 5% 수익률로 투자합니다. 10년 후 박전세 씨의 자산은 이렇습니다. 전세 보증금 4억 원(그대로 묶여 있음)에 10년간 월 200만 원 적립투자 결과 약 3억 1,000만 원을 더한 총 7억 1,000만 원입니다.

최매수 씨의 10년 후 자산은 이렇습니다. 6억 원짜리 아파트가 연 3.5% 상승하여 약 8억 4,600만 원이 됩니다. 대출 잔액은 약 3억 5,500만 원으로 줄었습니다. 나머지 2억 5천만 원을 연 5%로 운용하면 약 4억 700만 원이 됩니다. 최매수 씨의 순자산은 (8억 4,600 - 3억 5,500) + 4억 700 = 약 8억 9,800만 원입니다.

박전세 씨 7억 1,000만 원 대비 최매수 씨 8억 9,800만 원. 같은 4억 원으로 출발했는데, 10년 만에 약 1억 9천만 원의 격차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레버리지 효과와 부동산 복리 상승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집니다.

전세의 또 다른 숨은 비용들

기회비용 외에도 전세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비용들이 있습니다.

첫째, 전세금 인상 리스크입니다. 2년마다 돌아오는 계약 갱신 시 전세금이 오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임대차 3법(계약갱신청구권)으로 한 번은 5% 이내 인상으로 보호받지만, 그 이후에는 시세대로 올라갑니다. 4억 원 전세가 2년 후 4억 2천만 원, 4년 후 4억 8천만 원으로 오르면, 추가 자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돈은 어디서 올까요? 대출을 받으면 이자가 발생하고, 저축에서 빼면 기회비용이 더 커집니다.

둘째, 전세 사기 및 보증금 미반환 리스크입니다. 최근 몇 년간 전세 사기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2022~2023년 대규모 전세 사기 사태에서 수천 명의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전세보증보험이 있지만 모든 경우를 커버하지 못하며, 보험 가입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4억 원이라는 거액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리스크입니다.

셋째, 이사 비용과 정착 불안정입니다. 전세 계약은 통상 2년입니다. 갱신하지 않으면 이사를 해야 합니다. 이사 비용, 중개수수료, 새 집 인테리어 비용 등이 발생합니다. 서울 기준 아파트 이사 비용은 200~400만 원, 중개수수료는 보증금의 0.3~0.4%인 120~160만 원 수준입니다. 2년마다 이사하면 연간 약 200만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전세가 합리적인 경우는?

전세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상황에서 전세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단기 거주가 확실한 경우입니다. 1~3년 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계획이 있다면, 매수 후 단기간에 매도하면 취득세, 양도세, 중개수수료 등 거래비용이 크기 때문에 전세가 유리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 매수-매도 시 거래비용은 매매가의 약 3~5%입니다. 5억 원 아파트라면 1,500~2,500만 원입니다.

매수 자금을 빠르게 모으는 과도기인 경우도 있습니다. 1~2년 안에 내 집 마련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고, 전세 보증금 대부분을 빠르게 회수하여 매수 자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전세는 잠시 거쳐 가는 단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 조정기에 전략적으로 대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조정기"의 판단이 정확해야 하고, 대기 기간이 길어지면 기회비용이 누적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기회비용을 "체감"하는 방법

기회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체감하는 실용적인 방법 하나를 제안합니다.

매달 1일에 "이번 달 전세 기회비용"을 계산해서 가계부에 적어 보세요. 보증금 4억 원이라면 월 117만 원(연 3.5% 기준)입니다. 이것을 매달 "주거비"로 기록하면, 전세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합니다.

1년이 지나면 가계부에 1,400만 원의 주거비가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1,400만 원은 실제로 "쓰이고 있는" 돈입니다. 다만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벌 수 있었는데 벌지 못한 돈의 형태로 소비되고 있을 뿐입니다.

보증금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미래

마지막으로, 전세 보증금 4억 원이 다른 형태로 활용되었다면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었는지 시뮬레이션해 보겠습니다.

4억 원 전액을 S&P500 인덱스 펀드에 투자했다면(연 평균 8% 가정), 10년 후 약 8억 6,400만 원, 20년 후 약 18억 6,400만 원이 됩니다. 물론 전세에 살면서 투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4억 원이 묶여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4억 원 중 1억 5천만 원을 아파트 매수 자기자본으로 활용하고, 나머지 2억 5천만 원을 투자에 활용했다면? 앞서 계산한 것처럼 10년 후 순자산 약 8억 9,800만 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같은 4억 원이라는 자산을 어떤 형태로 배치하느냐에 따라, 10년 후 결과는 수억 원 단위로 달라집니다. 전세 보증금으로 묶어두는 것은 그중 가장 비효율적인 배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세의 본질을 직시하기

전세는 한국 고유의 독특한 임대 제도이고, 분명한 장점도 있습니다. 매달 현금 지출이 없다는 심리적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의 대가로 매년 1,000만 원 이상의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전세에 살고 있다면, 한 번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보증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할 수는 없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내 집 마련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GIPTner가 정리한 내집마련 가이드입니다.